(좌) 웹툰 <악녀는 오늘도 즐겁다>, (우) 웹툰 <전령새 왕녀님> (출처: 작가 제공)
Q. 글로 표현된 감정과 상황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가장 어려운 건 정해진 컷 수를 맞추는 일입니다. 원작에서 묘사하는 분위기를 토시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가져갈 수 있다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한 회차당 100컷은 넘게 나올 것이라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컷을 60~70컷 내외로 맞춰야 하기 때문에 먼저 이번 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하나를 중심으로 잡습니다. 예를 들어 여주와 남주의 뜨거운 키스신, 여주가 통쾌하게 사이다를 날리는 장면 등, 이런 메인 사건에 컷을 집중 배분하고 앞뒤 상황은 최대한 압축해 컷 수를 확보합니다.
그럼에도 컷이 넘친다면, 상황 자체를 각색해서 핵심 서사가 더 잘 드러나도록 조정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이번 화에서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핵심’이 자연스럽게 선명해지더라고요.
Q. 무엇보다 웹소설은 독자의 상상력에 의존하지만 웹툰은 구체적인 비주얼을 제시해야 합니다. 원작의 여백을 채워나가는 작가님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저는 먼저 캐릭터에게 빙의해서 주변을 만들어 가는 편이에요. 원작의 상황 속에서 그 캐릭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앉아 있을지, 햇빛 아래에 있을지 달빛 아래에 있을지를 하나하나 상상해 봅니다. 또 캐릭터가 돋보일 수 있는 소품이나 독자라면 어떤 장면을 보고 싶어 할지를 고민하죠.
그다음은 연출에 필요한 소품이나 공간 배치가 필요합니다. 인터넷에서 스케치업으로 구현된 장소를 찾아보기도 하고, 실제 사진 자료를 보면서 상상 속 공간을 구체화합니다.
이렇게 준비된 무대 위에서 원작의 캐릭터를 움직여 보는 거예요. 서류가 흩날리는 가운데 격한 언쟁을 할 수도 있고, 차분히 차를 마시는 장면 속에서 가시 돋친 말을 던질 수도 있죠. 원작의 매력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제 나름의 연출로 독자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점이 각색 작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 각기 다른 장르의 작품들, 예컨대 <악녀는 오늘도 즐겁다>의 사이다 로맨스와 <전령새 왕녀님>의 판타지 모험을 다룰 때 각색을 하는 접근 방식도 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이때 경험을 들러주신다면요?
두 작품 모두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 속하지만, 독자에게 전해야 하는 메시지는 확실히 다릅니다.
<악녀는 오늘도 즐겁다>의 경우, 독자분들이 주인공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부딪혀도 유쾌하게 헤쳐 나가야 하고, 역하렘물답게 다양한 매력을 지닌 남주들과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죠.
후반부로 갈수록 전쟁과 정치가 얽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주인공을 진지하게 그릴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독자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지’ 하고 다시 조정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또 각 남주들의 매력이 뚜렷하게 달라야 재미가 배가되기 때문에, 각 남주의 키워드를 뽑아두고 여주와 어떤 썸을 타게 만들지 고민하는 과정이 즐겁습니다.
반면 <전령새 왕녀님>은 전쟁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메인 스토리입니다. 전쟁과 전략 설명이 많아 보니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었어요. 전략적인 설명은 최대한 그림으로, 설명은 간단히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새에 빙의된 상태라 남주와 로맨스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새지만 여주’라는 자각을 심어주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인간의 모습과 새의 모습을 적절히 섞어 사용했어요. 가볍게 투닥거릴 때는 새의 모습으로, 신뢰가 쌓이는 순간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보여주며 여주와 남주가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습니다. 결국 독자들이 원하는 건 여주와 남주의 로맨스이니까요.
Q. 담당하신 작품들이 해외에서도 번역되고 관심을 받고 있는데, 각색 단계에서부터 글로벌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시는 부분이 있나요?
처음부터 글로벌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다만 국내 독자들에게 먼저 사랑받아야 해외에서도 통할 수 믿었기 때문에, 우선은 한국 정서에 맞는 작업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부분을 해외 독자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처럼 K-문화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한국적인 정서 자체가 글로벌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Q. 한국적 정서, 나아가 한국 특유의 '빙의', '회귀' 같은 소재들이 해외에서도 통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또 각색자 입장에서 이런 요소들을 어떻게 보편적으로 어필할 수 있게 만드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빙의, 회귀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지금의 경험치를 가지고 이전보다 더 잘 살아가고 결국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또 독자들이 기대하는 ‘통쾌한 순간’을 확실히 담아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죠.
해외 독자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어디서든 아침 드라마를 보며 한마디씩 거드는 시청자가 있듯, 로맨스 판타지에서 ‘사이다 전개’를 원하는 독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존재하거든요. 이런 공통된 감성이 있기에 자연스럽게 글로벌에서도 통한다고 봅니다.
저는 보편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독자 반응, 특히 댓글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러 작품의 댓글을 읽다 보면 어떤 장면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어서, 작업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Q. 지금까지의 창작을 통해 원작 팬들과 웹툰 신규 독자, 나아가 해외 독자까지 모두를 만족시키는 '통하는 이야기'로 각색하는 비결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통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저 역시 그 이유를 찾기 위한 여행길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확실히 느낀 건, 원작 팬이든 신규 독자든 해외 독자든 모두와 연결되려면 먼저 제가 원작과 깊이 소통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원작의 감정과 매력,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야만 그것을 콘티로 충실하게 담아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가장 크게 와닿았던 요소를 담아냈을 때 독자분들의 반응도 가장 좋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Q. 구체적으로,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자들에게도 공감받는 스토리가 되기 위해 각색 과정에서 어떤 요소들을 특히 신경 쓰시나요?
로맨스 판타지를 보러 오시는 독자들의 니즈를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전령새 왕녀님>에서 전쟁 전략과 사건을 풀어내는 과정을 정말 좋아합니다. 하지만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많은 독자들은 결국 여주와 남주의 로맨스를 기대하며 작품을 찾아오십니다. 그런 분들께 “제가 좋아하고 잘 만든 전쟁물을 드셔 보세요.” 하고 내밀면 안 되겠죠.
그래서 각색 과정에서는 장르마다 독자가 보편적으로 원하는 지점을 중심에 두고, 제가 좋아하는 요소는 그 틀 안에서 균형 있게 녹여 내려고 합니다. 결국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문화적 배경을 넘어 공감받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 생각합니다.
Q. 각색 과정에서 원작자와 작화가, 편집자와의 팀워크도 성공작을 만드는 중요한 변수일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작업하는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작 작가님께는 작품을 제게 맡겨 주셨고, 웹툰의 호흡에 맞추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이 생략되거나 새롭게 창작되기도 하는데, 이런 변화를 이해해 주시며 응원해 주시는 점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화 작가님께서는 제 콘티를 잘 살려주시기 위해 노력해 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저 역시 연출을 더 다듬어 작화 작가님의 장점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콘티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상호적인 배려와 책임감이야말로 제게 가장 큰 동력이자 팀워크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동문 후배이자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 학생들에게 각색가로서 갖춰야 할 글로벌 마인드와 창작 철학에 대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창작 철학이라고 하긴 거창하지만, 내가 맡을 작품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덕질하는 작품을 독자분들께 잘 말아주고 싶은 마음. 저는 이 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그것이 제 작업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정리 : 조희정(만화콘텐츠스쿨 웹소설창작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