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 조희정, 양세준, 전혜정 교수 아래 : 조장호, 양혜림, 김선민 교수 / 사진 : 이현수(웹툰만화콘텐츠전공 교수)
❚진행
조희정 웹소설창작전공 교수
❚참석자
조장호 만화콘텐츠스쿨 원장
양혜림 웹툰만화콘텐츠전공 교수
양세준 웹툰만화콘텐츠전공 교수
김선민 웹소설창작전공 교수
전혜정 만화캐릭터일러스트레이션전공 교수
조희정 : 먼저 현재 콘텐츠 시장의 구조적 변화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웹툰 시장에서 한 요일에 105개 이상의 작품이 연재되고 있고, 웹소설은 매일 100개 이상의 신작이 나오는 등 시장은 포화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님들이 창작과 소비 패턴의 어떤 구조적 변화를 체감하고 계신가요?
양세준 : 스토리 창작에서 AI의 영향은 이미 현실입니다. 과거 스토리 보조 작가가 담당했던 아이디어 회의, 초벌 취재, 브레인스토밍 같은 역할을 ChatGPT가 상당 부분 대체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예를 들면, 제가 최근 그린 <보스 리턴>에서 악역 캐릭터가 총을 꺼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AI에게 "이런 상황에서 이런 캐릭터가 꺼낸다면 어떤 기종이 장르적으로 어울릴까"라고 물어보면 추천을 받을 수 있거든요. 물론 최종 검증은 작가가 해야 하지만, 초벌 취재 역할은 충분히 해줍니다.
AI의 가장 큰 장점은 24시간 대화할 수 있고, 아무리 핀잔을 주어도 토라지지 않으며, 대화를 정리해 주는 능력까지 있다는 점이에요.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것처럼, AI가 그런 대화의 상대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조희정 : 흥미롭네요. 독자 입장에서도 이런 AI 기술이 콘텐츠 소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텐데, 어떤 변화를 관찰하고 계시나요?
양세준 : 독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알고리즘에 의한 추천 시스템이에요. 제가 2015년부터 네이버웹툰에서 10년간 작업해 왔는데, 2015년에는 한 요일별 웹툰이 26개 정도였거든요. 지금은 한 요일에 105개가 넘어요. 4배 이상 늘어난 거죠.
예전에는 네이버웹툰에 올라오는 모든 신작을 읽어주는 독자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당연히 불가능하죠.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의 신작이 런칭돼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그래서 넷플릭스나 유튜브처럼 "당신이 이런 작품을 좋아했으니 이 작품도 한번 보세요" 하는 개인화된 추천 시스템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조희정 : 웹소설 쪽에서는 어떤 변화를 느끼시나요? 특히 매체의 변화가 서사 구조에 미치는 영향이 궁금합니다.
김선민 : 웹소설은 미디어 매체와의 관련성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어요.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종이책이라는 하드웨어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는데, 모바일 디바이스로 텍스트를 읽는 시대가 온 거죠.
웹소설은 매일매일 100개 이상의 신작이 올라오고, 하나의 작품이 거의 300회 이상이에요. 한 단행본 치면 10권 이상의 분량이죠. 이런 소비 패턴 때문에 글을 쓰는 방식과 서사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건' 중심에서 '이벤트' 중심으로 바뀐 거예요. 사건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감정적 측면이 중요하지만, 이벤트는 그냥 상호작용일 뿐이에요. 주인공이 던전에 들어가서 미션을 해결하고 보상을 받는 하나의 이벤트 자체가 인물 간의 관계성이나 감정의 변화 없이도 사건으로 성립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길어질 수 있는 거죠.
양세준 : 웹소설이 게임 서사의 스토리텔링과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해요. 게임에서는 더 어려워질 수는 있어도 망하지는 않거든요. 망하면 플레이어가 이탈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웹툰도 마찬가지예요. 장편 연재라는 특성상 중간에 독자가 이탈할 수 있는 포인트를 만들면 안 되거든요. 영화는 2시간 동안 어두운 극장에 관객을 가둬놓고 보여주는 콘텐츠라서 중간에 답답한 구간이 있어도 '사이다 서사'를 기다리면서 견뎌주지만, 웹툰이나 웹소설은 바로 뒤로가기를 누를 수 있으니까요. 그날 나오는 작품이 100개나 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죠.
김선민 : 맞아요. 웹소설 독자들은 주인공의 하강 서사를 인정하지 않아요. 무조건 주인공이 점진적으로라도 성장만 하는 레벨업 구조만 인정하죠. 이건 일반적인 스토리텔링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거예요.
조희정 : 글로벌 시장에서는 어떤 변화를 느끼시나요? 특히 양혜림 교수님께서는 일본 시장과의 협업을 통해 한국 콘텐츠가 해외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직접 관찰하고 계신데, 이런 경험에서 어떤 인사이트를 얻으셨나요?
양혜림 : 일본 시장을 보면, 웹툰에 대한 기대가 매우 구체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캠퍼스물, 학원 로맨스, 오피스 러브 스토리는 전혀 니즈가 없어요. 일본에는 이미 그런 장르를 잘하는 출판만화가 넘쳐나니까, 굳이 외국 작품까지 볼 이유가 없는 거죠.
반면 성공하는 건 명확해요. 로맨스 판타지와 현대 판타지 중심으로, '황제의 외동딸'로 시작해서 최근 저희 졸업생이 참여한 작품이 라인망가 1위를 차지하기까지, 일본에서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맛의 작품들이 환영받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독자층의 차이예요. 일본의 로맨스 판타지 독자층은 한국보다 연령대가 높고, 30대 후반에서 40대 직장 여성들이 주축이에요. '지친 OL'들이 황제나 장군 같은 남성미 넘치는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으로 치유를 받는 거죠. 그래서 수위도 높아야 하고, 남성 캐릭터도 '떡대'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양세준 : 한류 드라마가 일본에서 처음 성공한 것도 중년층부터였잖아요. <겨울연가>로 시작된 한류 붐도 배용준 팬덤의 중년 여성들이 주축이었고요. 지금 웹툰이 일본으로 나간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특정 장르에 대해서만 수요가 있는 거로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확장될 거라고 봅니다.
조희정 : 원장님께서는 이런 글로벌 확산과 동시에 국내 창작 생태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어떻게 관찰하고 계신가요? 교육자이자 동시에 스쿨을 이끄는 입장에서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조장호 :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양적 증가가 아니라 질적 전환이라고 봅니다. 콘텐츠 생산량이 폭증하면서 창작자들이 직면하는 경쟁의 양상도 완전히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잘 만들면 알아줄 것이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 만들어도 묻힐 수 있다'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교육자로서 고민이 깊어지는 건,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조희정 : 이런 급격한 변화 속에서 현재 교육과정에서 가장 고민하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전 전공을 아우르면서 어떤 교육적 딜레마를 경험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조장호 : 어느 순간부터 당위성을 찾고 설득하며 교육하는 저를 발견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제가 하는 것들이 그 시대의 트렌드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학생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게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10대가 공감하는 것, 20대가 공감하는 것, 30대가 공감하는 것들을 제가 다 이해하고 다 공감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도 저는 한 사람의 독자이기도 하니까 제가 공감하는 부분이 있고, 그 부분에 대한 당위성 찾기에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다행히 양세준 교수님께서 장르는 확장될 것이고 그것들을 위한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셔서 안심되기는 했어요. 학생들도 5년 후의 자기 모습을 상상하고 준비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당장 공모전에만 집중하다 보면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희정 : 말씀에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교육적 당위성의 문제가 결국 '스페셜리스트 교육을 해야 하는가? vs. 제너럴리스트 교육을 해야 하는가?'의 고민과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장호 : 저희가 웹툰 전공 교육과정 개발을 하면서 스페셜리스트 교육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있어요. 산업계에서 원하니까 그런 친구들을 교육해서 현장에 내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지금 저는 그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지금 예를 들어 일본 시장의 현황을 학생들이 1학년 때 들었다고 쳐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졸업할 때까지 3년, 여기에 휴학이나 군대까지 고려하면 5~6년이 걸리는데, 그때도 그 정보가 유효할 것이냐는 거죠. 그렇게 타겟팅된 교육에 대해서는 너무 무서운 거예요.
조희정 : 그렇다면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 교육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원칙이 있을까요? 교육에서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다고 보시나요?
양혜림 : 창작 교육에서 가장 어려운 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교수자가 이를 착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배경은 당연히 손으로 그리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스케치업이나 3D 툴을 쓰는 게 일반적으로 됐잖아요. 변하지 않을 줄 알았던 것이 30년 만에 바뀌어 버린 거죠. 그런 것들이 이제 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30년 만에 바뀌어 버린 경험을 하고 나면, 내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이것도 언젠가 변했던 게 아닐지 하는 의심이 생겨요.
모든 트렌드와 학생들의 취향을 다 파악하기에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변하지 않는 것만 가르치면, 그건 자습할 수 있는 영역이거든요.
조희정 : 그렇다면 교육자로서 이런 불확실성을 어떻게 관리하고 계시나요?
양혜림 :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하는 편이에요. “네가 나보다 잘 알고 있는 영역이 틀림없이 굉장히 많을 거다.” 라고요. 예를 들어 성인이 된 이후 계속 BL만 본 친구는 저보다 BL의 트렌드를 훨씬 잘 알 테죠. 소위 ‘먹히는 캐릭터’나 유행하는 이야기 구조에도 강할 테고요. 그럴 때는 제가 지도교수라 하더라도 “이게 맞아? 이거 이상하지 않아?” 하면 안 되고, 학생도 “교수님이 저렇게 얘기하시니까 이 엔딩은 바꿔야겠다." 하면 안 되는 거죠.
조장호 : 이게 교육 방식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탑다운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시대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협의하는 시대라는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예를 들어 "저녁때 헤어지는 남녀의 그림자는 푸른빛 또는 보라색이야"라고 색채론적으로 가르쳤는데, 학생이 "저는 노랗게 하고 싶은데요"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게 되거든요.
그러면 제가 오랫동안 공부했던 색채론은 굳이 왜 가르치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교육 구조 방식의 변화가 저희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조희정 : 이런 교육 방식의 변화와 함께 학생들 자체의 변화도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가르치시면서 어떤 세대적 특성을 관찰하고 계시나요?
전혜정 : 요즘 학생들의 말투가 크게 달라진 걸 느껴요. 옛날에는 "나는 이런 게 좋아, 나는 저런 게 싫어"라고 말했다면, 요즘 애들은 "이게 맞지"라고 해요. 맞고 틀린다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모든 걸 정답이 이미 있는 것으로 여겨요. 이건 창작자에게는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창작자는 정답이 없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애들은 그걸 너무 무서워하죠.
조희정 : 이런 변화의 원인을 어떻게 보시나요?
양세준 : 사교육 시스템의 영향이 큽니다. 줄넘기부터 학원에 다녔던 세대들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동네 형들한테 배웠던 많은 것들을 지금은 다 학원에서 배우거나 과외를 통해 배워요. 그 시스템이 단기간 내에 딱딱딱 정답을 얻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죠.
양혜림 : 10년 전에 제가 가르칠 때보다 요즘 학생들이 저한테 덜 덤빈다는 느낌을 받아요. 옛날에는 말도 안 되는 스토리를 갖고 와 놓고도 당당하게 “근데 저는 이렇게 하고 싶거든요?” 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조연이 갑자기 개연성 없이 등장했다가 빠르게 퇴장하는 장면이 있다고 할게요. 그럴 때 전 보통 “얘는 여기서 왜 등장했나요?” 하고 묻는데, 학생이 “그냥…. 전 여기서 얘가 꼭 나왔으면 좋겠어요.” 하면 저도 “왜요? 잘생겨서요?” 하고 다시 물어볼 수가 있어요. 그렇게 계속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다 보면 학생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게 뭔지가 드러나죠. 저도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되고요.
그런데 요즘은 “얘가 여기서 왜 등장했나요?” 하고 물으면 곧바로 “아, 뺄까요? 뺄게요, 교수님!” 해요. 그걸 원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나오면 맥이 좀 빠지죠.
학생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자신이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타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거든요.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었던 뭔가를 포기하고 나면 아마 작가도 작업이 재미없을 거고요.
조희정 : 그런데 이런 현상이 단순히 '패기의 부족'으로만 해석될 수 있을까요? 혹시 이 세대가 직면한 현실적 조건들, 예를 들어 취업이나 경제적 불안정성 등이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요?
조장호 : 그 부분도 분명히 있어요. 예를 들어 원하는 교수님 수업을 수강 신청에 실패했다고 두 학기 연속 휴학을 한 친구가 있었어요. 1년 정도는 본인의 꿈을 위해서 투자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걸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게 놀라웠어요.
하지만 동시에 당장 학원 알바를 그만두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고, 상황마다 다른 거죠. 그래서 교수자의 역할이 길을 정해주는 게 아니라 "이 길로 가면 이런 위험이 있다" 정도만 알려주는 거로 생각해요.
양혜림 : 맞아요. 생각해 보면 학생들이 "뺄까요?"라고 물어보는 것도 사실은 되게 절박한 질문일 수 있어요. 작가로서 내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이 캐릭터를 뺌으로써 취업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수 있다면 주인공도 바꾸겠다는 거죠. 청강대가 예술대학교가 아닌 문화산업대학교라는 게 많은 걸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 학생들에게는 창작을 업으로 삼으려는 목표가 있어서 이런 현실적 고민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조희정 : 학생들의 역량 측면에서는 어떤 변화나 문제를 관찰하고 계시나요? 특히 현재 입학하는 학생들의 특성은 어떤가요?
양세준 : 제가 제일 걱정하는 친구들이 4학년인데 전 과목 A+를 받는 친구들이에요. 물론 성실한 학생들이지만, 전 과목 A+가 나올 정도면 학교생활 이외에 뮤지컬을 보거나 친구들을 만나거나 스포츠를 즐길 시간이 있었을까 걱정돼요.
작가가 되는 데 필요한 역량에는 내공에 해당하는 부분과 감각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어요. 내공은 자기 전공 분야인 만화를 많이 읽고 많이 그리면 깊어지지만, 감각은 만화 바깥에서 찾아야 해요.
유머 감각은 친구들과 웃기고 싶어 하는 애가 만화에 잘 녹여내고, 패션 감각도 실제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만화에서 잘 표현해요. 개그만화를 보고 개그를 배운 애는 보통 오타쿠만 이해할 수 있는 개그만 하게 되거든요.
조희정 : 그렇다면 이런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양세준 : 학생들에게 수업 시간에 계속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너희 야구 경기도 보러 가고 뮤지컬도 보러 가고, 자기 취향을 찾아가는 게 창작자로서 굉장히 중요한 거야"라고요.
제가 대학 다닐 때 가장 도움이 된 수업 중 하나가 시간표를 잘못 짜서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러시아 문화의 이해' 같은 전혀 관심 없던 과목이었어요. 내가 전혀 관심이 없었던 분야이기 때문에 다 새로운 정보였거든요. 그런 경험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김선민 : 웹소설 쪽은 좀 다른 상황이에요. 웹툰과 달리 우리 학생들은 스킬이 부족한 상태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 친구들은 틀을 깨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어 해요. 문제는 발상이 굉장히 약하다는 거예요. 자기만의 독특한 소재를 '마이너한 소재'라고 숨기려고 하죠.
웹소설은 사실 마이너한 소재가 없어요. 모든 소재가 다 될 수 있거든요. 잘 쓴 것과 못 쓴 것의 차이일 뿐이지, 마이너한 소재이기 때문에 내 소설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인식이에요. 못 썼기 때문에 안 팔리는 거고, 안 팔리니까 아무도 안 보는 거거든요.
조희정 : 우리가 교육과정 안에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김선민 : 저는 개인적으로 교육과정이 더 빡빡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학생들이 기본적인 클리셰나 장르의 전형적인 패턴에 대해서 꼼꼼하게 학습해야 그다음에 자신만의 색깔을 찾을 수 있거든요. 3년 동안 이것만 해도 무척 바쁠 텐데, 우리 친구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조희정 : 이제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교육의 방향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청강 만화콘텐츠스쿨의 3rd Wave'라는 맥락에서, 각 전공에서는 어떤 교육철학과 방향성을 가지고 가는 걸까요?
조장호 : 3rd Wave라는 건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1st Wave가 기술적 숙련을 추구했고, 2nd Wave가 산업적 성공을 목표로 했다면, 3rd Wave는 창작자 개인의 내적 동기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고려하는 단계라고 봅니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것, 알고리즘이 예측할 수 없는 것, 시장이 요구하기 전에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창작자를 기르는 게 우리의 목표예요. 이는 기술과 예술, 상업성과 작가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교육이죠.
조희정 : 전공별로 이런 철학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김선민 교수님께서 웹소설창작전공이 시도하고 있는 변화를 정리해 주신다면요?
김선민 : 웹소설창작전공은 처음에는 이론적 부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어요. 문창과나 일반 인문학 과목들처럼 기초적인 이론들을 중심으로 했죠. 하지만 학생들이 아는 것은 많아지는 데 실제로 쓰는 것에서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래서 실기를 강화하고 실제로 글 쓰고 싶은 친구들을 데려와서 실질적으로 작품을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뽑을 때도 실기 전형 비율을 늘렸고요.
기술적인 부분은 어떻게든 가르칠 수 있는데, 지속 가능하게 쓰는 게 제일 중요해요. 이건 몰입하는 것과 창작 환경이 핵심입니다. 청강이라는 공간에서 3년 동안 열심히 글을 쓰는 방법을 체득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그래서 일반 교과과정뿐만 아니라 비교과와 자치활동까지 고려해서 학생들에게 몰입의 경험을 주는 것까지 교육과정에 포함하고 있어요.
조희정 : 웹소설에서 AI 활용에 대해 실험도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어떤 결과를 얻으셨나요?
김선민 : AI를 활용해 보니 흥미로운 걸 발견했어요. 문체가 독특할 때 AI가 훨씬 더 잘 생성해요. "무라카미 하루키 스타일로 써달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나오죠. 미학적인 문장을 잘 만드는데, 그러면 반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거예요.
반면 웹소설은 AI가 학습을 잘 못해요. 문체의 특징이 별로 없어서요. 대신 패턴 학습을 해요. 판타지, 무협, 현대물 같은 장르별 세계관 정보를 학습하죠. 이걸 통해서 문학과 웹소설과 장르문학이 가진 각각의 특징들이 뭔지를 AI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희정 : 만화스쿨에 내년부터 만화캐릭터일러스트레이션전공이 신설됩니다. 전혜정 교수님께서는 신규 전공을 통해 어떤 새로운 시도를 꿈꾸고 계신가요?
전혜정 : 저는 웹툰이나 웹소설보다 훨씬 빠른 사이클을 가진 뉴미디어 콘텐츠를 다루고 있어요. 일타툰 같은 형태 말이죠. 이런 영역에서는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항상 틈새가 있다는 거예요.
웹툰도 강풀 작가님의 일상툰에서 시작해서 지금의 대형 IP가 됐잖아요. 사람들은 여전히 카카오톡 이모티콘에서 가장 많이 결제하는 게 가나리 같은 단순하면서도 잘 만든 캐릭터예요. 알고 보면 엄청나게 잘 그린 그림이거든요. 하찮게 그린 채로 못 그린 것 같은데 사실은 가장 귀여운 강아지의 모습을 담아낸 거죠.
엄청나게 잘 그린 그림, 긴 서사, 거대한 IP보다는 어깨 힘 빼고 그리는, 동시대의 감각을 건드리는 게 항상 수요가 있어요. 이건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부분을 계속 찾아나가는 것이 신규 전공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조희정 : AI 시대에 창작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요? 특히 창작자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계신가요?
양세준 : AI 시대에 중요한 건 결국 '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입니다. 미술사를 보면 사진기 개발 이후에 오히려 슈퍼스타가 많이 생겼어요.
사진기 개발 이후 미술가들이 붓터치를 남기기 시작했고,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인상주의부터 현대미술까지 다양한 스타일이 나왔거든요. 그전에도 르네상스 후기 매너리즘 시대에 퀄리티가 너무 높은 것들만 나와서 질린 나머지 뒤틀린 인체를 그리기 시작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AI나 디지털 작업이 퍼지고 스튜디오 작품들로 퀄리티가 확 올라간 상황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건 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에요. 그리고 결국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지문 같은 스타일을 갖는 것이 학생들이 고민해야 할 분야죠.
전혜정 : AI는 지브리 그림을 학습해서 지브리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지브리 것이라는 걸 다 알아봐요. 어쩌면 이건 지브리의 승리죠. 그러면 우리 아티스트들이 가야 할 방향이 어딘지 명확해지는 거예요.
조희정 : 그렇다면 교육과정에서 이런 개별적 스타일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양세준 : 이건 '스타일 설계 수업'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수업 중에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계속 이야기해 주는 거죠. "너 여기가 해부학적으로 틀린 건 알고 있겠지만, 네가 원하는 효과가 이거라면 다리 두 번 꺾여도 돼. 알고는 있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장려를 계속해 주는 거예요.
조희정 : 학생들이 자신만의 특성을 찾아가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특히 개별성과 창작자로서의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 방법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양혜림 : 대학원에서 지도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나만의 변별점을 말해보라"고 하셨어요.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죠. "과외를 4년 했다"고 하면 다른 누군가도 있고, 결국 "손가락 세 번째 마디에만 털이 두 개 있어요" 이런 정말 디테일한 나만의 특징까지 가야 말할 수 있는 질문이더라고요.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질릴 때까지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 들여다보는 시선이 비관적이어서는 안 돼요. "내 안에서 빛나는 부분이 뭐가 있고, 나는 나의 어디를 좋아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요.
창작자는 어쩌다 나온 대사 하나, 어쩌다 나온 멋있는 장면 하나 갖고 가는 거잖아요. 그거를 소중히 여기고 10년간 붙들어도 되니까, 자기애를 많이 키우고 관찰했으면 좋겠어요.
조희정 : 그런데 이런 개별적 특성을 발견하고 기르는 것이 시스템으로서의 교육과정에서는 어떤 한계가 있을까요?
조장호 : 이게 저희가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뭔가 부족하다고 하면 "그럼 그쪽으로 관심을 줘서 시스템화해 볼까?" 이런 식으로 접근하게 되거든요. 애들한테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시간을 주는 시스템을 만들고, 과제가 많다고 하면 과제를 줄이고….
그런데 자꾸 시스템으로만 해결하려다 보면 결국 우리까지 같이 힘들어지고 모두가 지치는 것 같아요. 좀 다른 방법의 해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양혜림 : 맞아요. 학교에서 해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건 분위기 조성 정도인 것 같아요. 본인이 본인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가는 건 누가 시킨다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그냥 격려하면 되는 거죠.
조장호 : 결국 지역적, 지리적 문제도 있어요. 뭔가 낯설게 해주고 싶은데, 여기에 갇혀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낯설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거죠.
전혜정 : 우리는 항상 뭐가 부족하다고 하면 시스템을 만들어서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그보다는 애들 스스로가 찾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조희정 : 앞으로의 창작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한 말씀씩 해주시겠어요? 특히 우리가 지향하는 3rd Wave 교육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들려주세요.
전혜정 : AI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는 AI는 좌절하지 않고 뭔가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은 쓰고 싶어서 쓰고, 그리고 싶어서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작품을 해요.
그 '하고 싶다'는 마음은 나를 들여다보고 나와 세상의 관계에서 생기는 거거든요. 인간은 몸이라는 걸 가지고 있고, 이 몸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살아가고, 이 몸 때문에 좌절도 해보고 그러면서 자아도 생기고, 그런 과정에서 진짜 창작 욕구가 나오는 거예요.
하고 싶어 못 견디는 순간은 인간에게만 있어요. 뭔가를 보고 자극을 받거나, 어떤 걸 보다가 나도 이런 걸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이 하고 싶다는 마음을 잘 찾게 만드는 게 AI 시대에 가장 중요합니다.
양세준 : 장르가 확장될 것이고, 그것들을 위한 기본기가 중요해요. 하지만 동시에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지문 같은 스타일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학생들이 기본기 없이도 '우리는 소수에게 강하게 꽂히는 작품을 만들 거야'라고 하면서 대화를 많이 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네가 이 캐릭터를 넣은 이유가 뭐야?" "저는 안경 쓴 남자 안 나오면 만화 안 봐요." 이런 대답을 듣고 싶은 거죠. 그럼 "그래 그럼 안경을 써야지" 할 수 있잖아요.
학생들이 너무 겁먹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한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김선민 : AI를 활용해서 여러 실험을 해보니 결국 중요한 건 창작에 대한 의욕과 불꽃이더라고요. 스킬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그 의욕이 있으면 언제든지 향상될 수 있어요. 그걸 계속 북돋아 주는 게 더 중요합니다.
스킬보다 중요한 건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에요. 청강이라는 공간에서 3년 동안 몰입의 경험을 주는 것, 그것이 저희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양혜림 : 교육자의 역할은 길을 정해주는 게 아니라 "이 길로 가면 이런 위험이 있다." 정도만 알려주는 거로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자신만의 변별점을 찾을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죠.
조장호 : 결국 정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지속 가능한 창작 동력을 기르는 것이 3rd Wave의 핵심이죠.
학생들이 5년 후, 10년 후에도 계속 창작할 수 있는 내적 동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역할입니다. 기술이나 트렌드는 바뀌어도 자신만의 질문을 품고 있는 창작자는 어떤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거든요.
조희정 : 마지막으로 문화산업대학교로서 청강이 추구하는 교육이 상업적 성공과 예술적 가치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보시나요?
조장호 : 이게 바로 3rd Wave가 지향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1st Wave에서는 기술만 잘 가르치면 됐고, 2nd Wave에서는 시장이 원하는 것만 만들면 됐어요.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학생들에게 항상 하는 얘기가 "네가 마흔 전까지만 데뷔하면 부모님이 생활비를 대주신다"라는 친구와 "당장 학원 알바를 그만둘 수 없는" 친구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데도 둘 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어야 해요.
상업적 성공과 작가적 가치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찾았을 때 그것이 결국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걸 우리 졸업생들이 계속 증명해 주고 있잖아요. 황영찬 작가, 김칸비 작가, 기맹기 작가, 주동근 작가 모두 자신만의 절실한 질문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이 세계적으로 통했거든요.
전혜정 : 맞아요. 결국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는 거죠.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